월트디즈니 이야기 2024년 05월 12일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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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디즈니 이야기
월트디즈니 (Walter Elias Disney)
1901년 12월 5일 ~ 1966년 12월 15일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스의 창작자이자 성우였던 그는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입니다.
월트는 1901년 12월 5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다섯 형제 중 하나였습니다. 월트가 4살 때, 월트의 부모는 시카고의 번잡한 도시생활이 아이들의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형들과 달리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았습니다. 월트는 미술학교에 다니고 싶어 했지만 당시 그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고, 아버지 역시 반대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너무 가난해서 그는 하루에 1300장의 신문을 배달해야 했습니다.
월트가 7살이 되었지만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버지와 함께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팔이를 하다가 신문에 나온 만화를 많이 볼 기회가 생겼고 그는 아버지에게 그림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월트의 노력에 감동받아 이를 허락해 주었고 근처의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아주 어린 나이에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친척과 이웃에게 그림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또한 학교 신문에 만화를 그렸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예전에 시카고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에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습니다. 월트는 군대에 간 형들을 생각하며 해군에 자원입대를 하려고 했지만, 당시 16세이던 월트는 나이제한으로 인해 입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친구로부터 적십자사에 구급 부대가 새로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되었는데 하지만 그곳에서도 나이제한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월트는 지원원서의 생년월일을 1901년에서 1900년으로 고쳐 지원하여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훈련소에 들어가 부상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배우며 적십자 부대에 끼어 프랑스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월트가 속한 부대는 파리에 본부를 두고 계속 활동을 하였습니다. 월트는 부대의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월트의 그림 솜씨는 온 부대에 알려지게 되었고 군인들은 월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후 크래커라는 동료의 권유로, 패전한 독일군들의 철모에 그림을 그리고 미국에 와서 기념품으로써 그것들을 팔았습니다. 적십자사에서 일해 번 돈의 대부분은 어머니에게 부쳤다고 합니다.
1919년, 월트는 본격적인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캔자스로 갑니다. 그곳에서 만화가나 혹은 그에 관련된 직업을 구하려고 했으나 쉽게 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광고용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이면서 촬영하는 1분짜리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월트는 집의 차고를 스튜디오로 개조해 거기서 다니던 회사의 카메라를 빌려다 영화적인 기교를 익혔습니다.
회사에서의 낮일이 끝나고 나면 월트는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캔자스 시티 미술학원에 다니며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기본기를 닦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제 영화광고업자로 전환한 회사의 사장 코 거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요청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매체에 관심이 많았던 코거 조차도 셀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름을 쓰는 일에는 반대했고 월트는 결국 자력으로 첫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에 월트는 19세의 나이에 캔자스에서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애니메이션 회사라는 평생의 꿈을 시작했습니다. "래프 오 그램 (Laugh-O-Gram)"이라고 이름 지은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회사 동료였던 하먼 형제와 만들어서 뉴먼 극장의 주인 프랭크 뉴먼을 찾아갔습니다. "래프 오 그램"은 그 시절의 소단위 규모의 사회문제들을 풍자한 짧은 만화로 신문에 연재되는 풍자만화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월트가 찾아간 뉴먼은 예전에 월트가 일했던 미술가게의 페스먼이 소개해준 자였는데 1분의 짧은 시사를 마친 뒤 지체 없이 그 필름을 사고는 월트와 시리즈 계약도 맺었습니다. 훗날 월트는 자신의 작품명을 따 "래프 오 그램" 필름사를 설립하고 19세의 미성년자의 신분으로 그 회사의 사장이 된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거의 없었고 결국 그는 단 한 편의 만화도 팔지 못했고 그의 회사는 파산했습니다.
재정적인 문제로 "래프 오 그램"의 운영이 쉽지 않았던 월트는 새로운 시작점을 할리우드로 결정지었지만 당대 애니메이션의 중심지는 뉴욕이었다. 월트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해서 찾아다닌 일도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실사영화의 감독직이었습니다. 이전에 형과 함께 개고생을 하며 만든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 필름을 가지고 계약을 해볼 심산으로 여러 스튜디오 문을 두드렸지만 길은 열리지 않았고 결국 실사영화의 감독이 되는 것도, 앨리스 코미디를 파는 것도 몇 개월 만에 모두 포기했습니다.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찾아왔는데 헐리우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배급자인 마거릿 윈클러가 월트 디즈니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워너 브라더스의 비서인 동시에 자신만의 캐리어 확장을 꿈꾸던 그녀는 월트의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를 보자마자 시리즈의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는 시리즈 배급계약을 제의했습니다. 일이 워너브라더스에 있던 윈클러의 상사에게도 알려지면서 그렇게 월트 디즈니의 워너브라더스에서의 첫 번째 경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계약을 끝난 뒤에도 월트를 괴롭혀왔던 돈은 여전히 커다란 벽이었습니다.
그런 월트를 도와준 사람은 형 로이 디즈니 였습니다. 로이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제작에 뜻이 있지는 않았지만 월트의 열정에 감복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반을 병으로 인해 누워 보내면서도 월트를 위해 사무실을 구하고 새로운 아파트를 임대까지 해주었습니다. 형제는 마침내 1923년 10월에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의 첫 간판을 달았다.
만화가는 이번에도 새로운 캐릭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관객들은 그의 영화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두 번째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유통업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세 번째 시도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캐릭터인 미키 마우스(Micky Mouse)는 히트를 쳤고 그에게 훌륭한 게임을 선사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꿈꿨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디즈니는 1934년에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모두가 그것이 나쁜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영화는 3년이 걸렸고 현재 비용은 2,500만 달러에 달합니다. 이 때문에 월트는 돈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3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제작하여 개봉하였는데 당대에 엄청난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애니메이션은 장편 영화 상영 도중 잠시 틀어주는 소품 같은 개념이어서 월트 디즈니의 도전은 무모하다고 여겨졌지만 개봉 직후 모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며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화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걸작으로 꼽혔습니다. 오늘과 같은 134달러를 벌었습니다. 이 영화는 1938년에 가장 성공적인 영화였습니다. 성공에 이어 그는 도널드 덕, 미키마우스, 구피, 플루토 카툰 시리즈의 다양한 캐릭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939년 버뱅크에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를 열었고, 195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즈니랜드 테마파크를 열었습니다. 월트 디즈니는 생애 동안 59번 후보에 올랐고 22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습니다.
1955년 월트는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디즈니랜드라는 거대한 어린이 유원지를 설립하여 영화 제작자 이상의 사업가로서도 자리를 굳혔습니다. 애니메이션의 황금기(Golden Age of Animation)는 그의 노력과 창의성 덕분입니다.
1966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오락이라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실패를 맛보았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넘어진 후에도 인내와 노력 덕분에 그는 훨씬 더 많은 에너지로 일어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의심할 여지없이 믿었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